일본 대지진의 교훈에 대한 다른 시각
3월 11일(금) 오후 2시46분, 9.0의 강진이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불과 몇 십분 만에 동북부 해안지대가 메가톤급 쓰나미로 폐허가 되고 일본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자연재해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뉴스 속보로 접한 일본의 대재앙 앞에 우리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의 재앙 앞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일순간 고민하게 되는 건 여전히 어쩔 수 없는 그들과 우리의 오랜 감정 때문인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사상 유례없는 대 재앙 앞에 때론 소름끼칠 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한 일본인들의 태도에 놀랍기도 합니다. 언론에서는 이런 일본인들의 공공질서의식과 침착한 모습에 한국사회가 교훈을 얻고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일본의 정서를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 그들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겸손과 배려의 미덕
일본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겸손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교육의 핵심가치로 삼고 훈련을 받습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능력을 집단 속에서 크게 들어내지 않음으로써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배타성이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본 특유 집단주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참사 때에도 이런 겸손과 배려의 미덕이 발휘되어 한 그릇의 우동을 놓고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모습이나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급수를 위해 도착한 소방차 앞에 생수병 한 두 개만 들고 긴 줄을 서있는 모습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겸손과 배려의 정서는 전세계 어느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며, 이런 일본인들의 겸손과 배려가 폐전 이후 30만에 일본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이끈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진피해로 동료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침착한 표정으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은 일본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타인에 대한 겸손과 배려의 극치(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소리 내어 울거나 슬퍼하는 감정을 들어내지 않음.)라고 생각됩니다.
2. 공공 질서의식
지진으로 인해 하루 3시간씩 전력공급이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어느 새벽시간, 캄캄한 도로 위를 지나던 차가 아무도 없는 길에서 켜진 빨간 신호등을 보고 한참을 서있다가 파란신호를 보고 출발하는 모습이 기사에 실리고, 지진으로 출입문과 벽이 무너진 어느 편의점에서 돌아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줄을 늘어선 일본인들의 모습이 전세계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센다이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물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
지진이 막 일어난 시간 도쿄의 어느 간선 지하철 전동차 안의 시민들은 철도직원의 안내방송에 따라 어느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고 한참을 전동차 내에서 기다리다가 역무원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철도위로 대피하는 모습도 방송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라면 저렇게 침착하게 역무원의 지시를 따를 수 있었을까? 만일 나라면 저 상황에서 편의점 앞에 서서 기약 없는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을까?’ 질문해 봅니다. 세계인들이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이러한 질서의식은 앞서 이야기한 일본 특유의 겸손과 배려에서 출발합니다.
‘나 하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오랜 훈련과 학습을 통해 얻어진 결과입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사회, 제도적 시스템과 메뉴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기상황에 개개인의 즉흥적인 행동보다는 무리 속에서 매뉴얼화 되어있는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과 학습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이러한 시스템과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개개인의 공공질서의식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3. 일본의 집단주의
일본은 지리적으로 섬나라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동종적으로 피가 섞이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문화에는 종족적 동질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형화된 영토내의 인구가 늘어나고 농경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개성보다는 집단적 협력이 식량을 생산하는 데나 잦은 자연재해부터 생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수 천 년에 걸쳐 학습해왔습니다.
이러한 지리학적 배경으로 일본사회는 고대부터 집단의 질서를 어기는 무리를 솎아 낸다는 ‘무라하치부 村八分(むらはちぶ)’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일본사회 속에서 일본식 집단주의를 나타내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겸손과 배려로 공공의 질서를 철저하게 지키며,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지만 그런 집단의 테두리를 벗어나거나 튀는 행동을 하는 대상에게는 집단이 하나의 거대한 괴물로 변해 집단 내에서 질식시켜 버립니다.
일례로, 이번 지진과 원전의 방사능 누출 피해를 한국언론들이 매일 일간 톱으로 긴박하게 보도하는 반면 일본 현지 언론들은 그저 차분히 현장 소식을 전달하고만 있다고 합니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에도시대의 시타마치(下町) 전경.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내진구조를 적용하다 보니 지붕에서부터 바닥은 물론 벽까지 온통 목재를 사용한 것이 일본의 가옥들이었다. 게다가 한정된 땅에 한데 모여 살다 보니 한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금세 마을 전체로 불이 번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진이나 방사능유출로 인해 타 지역이나 해외로 피난했다가 모든 사태가 종료된 뒤 무리로 돌아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무리에서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피난했는데 한 대학교수가 한국으로 피난간 유학생들의 명단을 요구한 사례도 있습니다.
역사상 유례없이 큰 재해를 입은 이웃나라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듬으며, 지구촌의 따듯한 인류애를 실천할 기회가 온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 천 년간 외세의 침략을 견디고, 36년간 국권을 침탈당하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고 친일세력들의 정치경제력적 장악 앞에 옳고 그름에 대한 상식마저 뒤엉켜버린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로 인한 번영과 탐욕으로 살찌워진 온실 속 사회를 살아온 그들과 똑 같은 기준에서 비교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개천에서 떠오르는 용의 비상을 준비해야 하는 격동의 우리사회가 고요한 호수에 비유되는 일본사회와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현실이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과 다소 멀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현실 속의 결핍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현명함이 더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과거사 하나 청산하지 못하여 이웃나라들에게 조차 존경 받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선진국 일본, 그러나 역사상 유례없는 자연재해로 어느 때 보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때이며 인류적 차원의 도움과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함에 온 국민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지진피해자들에게 위로하는 위안부 할머니와 일본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
따라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전 세계 언론은 집단주의 속에서 잘 훈련 받은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에만 주의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이웃나라 일본이 처한 어려움에 진심 어린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지진을 통해 얻어야 할 교훈은 우리들 보다 일본인들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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