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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문화와 예술을 주도한 파리의 카페, 되 마고와 플로르

by IBK.Bank.Official 2012. 11. 7.

문화와 예술을 주도한 특별한 공간

파리의 카페 이야기, 되 마고와 플로르


"나의 집과 카페의 관계는 결혼과 연애의 관계와 같다."

"카페는 집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단점을 모두 치워낸 장소다."

"카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자유의 터전'이다."

"카페, 집에는 도저히 초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는 곳."



유럽의 카페 마니아들이 남긴 경구들입니다. 카페를 떼어놓고 유럽인의 삶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카페는 일상과는 다른, 한가롭고 특별한 공간이며 익명이 공인되는 장소입기 때문입니다. 유럽인들은 카페를 통해 일탈과 해방을 꿈꾸었으며, 혁명과 자유를 외쳤고, 문화와 예술을 주도했습니다. 20세기 초 프랑스 전역에 60만 개의 카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카페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잠시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귀족의 살롱에서 시민의 카페로


16세기 유럽인들은 지금의 한류 열풍처럼 오리엔트에 열광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오스만튀르크의 수도로 동서양의 가교인 동시에 최대의 시장이었으며, 특히 인도산 향료와 이집트 설탕, 예멘의 커피는 이스탄불 상인들에 의해 전매되었습니다.


터키풍의 옷을 입고 고급스러운 중국 도자기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무어인의 시중을 받는 풍속이 유럽 상류층 사이에 대유행하면서 커피는 시민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카페가 생기기 이전 사교와 담론의 장이었던 살롱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문화적, 사회적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들의 화제는 사랑, 운명, 허영, 연애 등 귀부인들을 위한 관심사가 주를 이루었는데, 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철학자들이 살롱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살롱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으면서 이때부터 작가, 화가, 음악가 등 유럽의 문화사를 주도한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밤의 카페 | 고흐 | 1888년 | 예일대학교 미술관 소장


카페 되 마고(Deux Magot)


1686년 프랑스에 처음 선보인 프로코프(Le Procope)는 살롱의 고급 문화를 이어받으며 프랑스 지성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1789년을 전후해서는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의 주역들이 이곳에서 작전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프로코프의 뒤를 이어 1885년 문을 연‘되 마고’는‘좋은시절’로 일컬어지는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를 구가했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아드리아나가 되돌아가고 싶어 하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입니다. 


'되 마고’는 현대 미술사를 빛낸 몬드리안, 피카소, 만 레이 등의 예술가들과 조르주 상드, 발자크, 에밀 졸라 등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이곳을 찾으며 파리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2개의 중국 인형’을 뜻하는‘되 마고(Deux Magot)’란 이름은 중국에서 유래된 차(茶)에 대해 경의를 표시한다는 뜻으로 붙여졌다고 하나, 실은 차가 아니라 실크의 원산지로서 중국을 상징합니다. 카페가 들어서기 전 이 건물이 중국산 실크를 파는 가게였기 때문입니다.


1920~1930년대를 풍미했던 시인 릴케와 장 콕토, 오스카 와일드 등이 제집 드나들 듯하며 문학의 꽃을 피우던 곳이 바로 카페 되 마고입니다.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 고흐 | 1888년 | 크뢸러뮐러 미술관 소장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


되 마고와 함께 파리 카페 문화를 선도했던 플로르는 작가, 예술가들의 창조의 공방이었습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늘 부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이 이곳에서 탈고되었고,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등의 작가들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들, 패션계 거물들, 정치인들,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이곳의 단골이었습니다.


플로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부부입니다. 그들은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간부터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집필하고 토론하면서 문학과 철학의 신화를 일구어냈습니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다. 이들은 각자의 아파트에 사는 계약 부부였는데 <제2의 성>에서 주장하듯이 남녀는 자유로운 주체로 상대를 존중하는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고 합니다.


<출처 : http://flic.kr/p/a7Eh2Q>


사르트르는 이곳에서 소설, 희곡, 철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는데, 보부아르 몰래 다른 여인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매일 10통씩 썼다고 하니 그의 왕성한 필력이 새삼 부럽기도 합니다.


1920년대 헤밍웨이도 파리를 사랑했습니다. 저서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그는“만약 당신이 젊은 시절 파리에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면, 당신이 평생 어디를 가든 파리는‘움직이는 축제’처럼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즐겨 찾던 카페는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 되었고, 흰 상의와 검은 바지 차림의 가르송이 테라스를 정리하는 모습은 카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프랑스 전국에 60만 개를 넘었던 카페는 점점 줄어들어 현재 5만여 개의 카페만이 영업 중이며, 남은 카페들도 철학 카페, 심리학 카페, 사이버 카페, TV 토론 카페 등으로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전통을 지키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노력이 새로운 벨 에포크(La belleépoque)를 창조할지 지켜볼 일입니다.



IBK기업은행 송도테크노파크 지점 이현숙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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